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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식의 엄격함과 프란치스칸적 단순성
트리골로의 아르세니우스

Blessed Arsenius of Trigolo
1849 - 1909



어린시절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1849613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의 트리골로에서 12자녀 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6일 지난 뒤, 그는 트리골로의 성 베네딕토 성당에서 조세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 글레체리오 밀그리오바카(Glicerio Migliavacca)와 아눈치아타 스투미아(Annunciata Stumia)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들은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빵집 겸 여인숙을 운영했다. 조세뻬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어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했고 결국 크레모나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1863년부터 1873년까지 그는 그곳에서 학업 과정을 마쳤다. 그 시기는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탈리아 왕국과 바티칸의 관계가 좋지 않는 때였다.

 

14살의 조세뻬에게 사제로 살아가기로 한 그 선택은 편한 길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방책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의 문화적·사회적 분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 소년의 대담하고 성숙하면서도 확고한 선택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7110, 제레미아 보노멜리 주교가 크레모나를 방문했을 때, 그는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든 32명의 신학생들을 보았고, 그 신학생들 하나는 아르세니우스 형제였다.


 

신학생 조세뻬  

젊은 조세뻬의 포부는 분명했다. 거룩한 사제가 되는 것! 그는 자신의 영적 일기에 이렇게 썼다. “, 사제가 더 완벽하다면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지식은 좋은 것이고 매우 필요하지만(배움 없이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없기에), 만일 참믿음과 완전을 통하여 지식을 깨치지 못한다면, 교만과 영적 허영만을 부추기지 않겠는가. 참믿음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우리의 비천함을 알게 해주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 모든 것을 다시 그분께 돌려드려야 됨을 알게 해준다. 참믿음이 없는 이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어쨌든 그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와 곤궁을 잘 알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 안에서 사제가 되어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믿음과 학업, 은총과 겸손은 여태껏 거룩한 사제에게 필요한 초석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믿음과 학업은 서로 갈라질 수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은총과 겸손은 서로 갈라질 수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사제들이 받게 되는 평범한은사들을 거론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명백한 평범성의 특성 안에서 그는 자신의 사목에 대한 근면성과 겸손한 충실성이라는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능력이 닿는 한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과 그의 사랑 말고는 그 어느 것도 전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복음을 모두 알리는 것이며, 무엇보다 세속을 멀리하고 십자가의 수치와 어리석음의 신비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예수회 입회 

1874321, 복자가 될 아르세니우스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파데르노 디 오솔라로(Paderno di Ossolaro, 오늘날의 파데르노 폰첼리)의 보조 사제로 파견되었다. 그 후에 카싸노 디아따(Cassano d’Adda)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아마 처음으로 젊은 구이세피나 푸마갈리(Giuseppina Fumagalli) 수녀를 만났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 위로자이신 지극히 거룩한 마리아 수녀회(Notre Dame du Bon Secours)’의 수녀로서 아르세니우스 형제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불리움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자신의 사제직을 살아갔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구원의 신비를 심오하게 거행하며, 동시에 이웃 사랑과 형제적 사랑에 충분히 매진할 수 있는 그런 은총이었다. 사제가 되기 위한 그의 선택은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였고 그는 진실되고 헌신적으로 그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영적 일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그는 수도자가 되어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 싶다는 열망을 수년 간느껴왔다.


커다란 성취감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도직을 고사하고픈 그의 끌림에 맞서 하느님께서는 다른 부르심으로 당신의 뜻과 승리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대담하게도 그는 결국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가 18751014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실행하고 싶지 않았다. 1876320, 피정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썼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는 그것을 당신을 뜻으로 알고 붙들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불안에 떨지 않겠습니다.” 그 후, 1877년 그의 나의 28살에 첫 수도서약을 했다.

 

일상적인학업에 대한 의무 때문에,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자신의 학문 활동을 중단해야 하는 등, 모든 일들이 힘들게 돌아갔다. 1879년에 크레모나 대학교로 편입하여 철학공부를 마친 다음, 1884년 이스트리아의 포르도레(Portoré in Istria)에서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해에 그는 비엔나 라인즈(Lainz, Vienna)에서 근신 기간을 가졌고, 그 후 1888815영적보조자로 양성을 받고종신서약을 했다.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그는 설교가, 고해사제,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교사로서의 자신의 사목과 특히 수녀회를 위한 피정지도자로서의 사목을 계속 이어갔다.


 

대격변의 시간  

1888년과 1890년 동안 베니스에서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다시 한 번 구이세피나 푸마갈리 수녀를 만났다. 현재 그녀는 위로자이신 지극히 거룩한 마리아 수녀회에서 제적을 당했으나 여전히 수녀복을 착용하고 있다. 그녀 또한 당시 젊은 여자들의 무리를 한데 모아 위로의 수녀들이라는 새로운 수도단체를 해당 주교의 허락 없이 시작한 상태였다. 당시 그 중 몇몇은 아르세니우스 형제의 영적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구이세피나 수녀와의 복잡한 관계로 그는 예수회 장상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그들의 결정대로 처음에는 토렌토, 피아센짜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예수회에서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짧은 저항의 시기를 가졌지만 그는 결국 재적 당했다.

 

몇 년 동안 참으로 대격변의 시간이 흘렀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심판과 실패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것 없었다. 홀로 고립된 이 상황에서 어느 누가 원통해하지 않을 수 있으며 공허한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더하여, 1892425, 튜린으로 건너 온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하느님의 뜻을 다시 한 번 더 받아들여야 했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의 강제적 결정으로 인해 더욱 더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다비데 데이 콘티 리까르디(Davide dei Conti Riccardi) 대주교에게 불려나간 그는 위로의 마리아라고 하는 새로운 수녀회의 영적 지도자로 채용된 것이었다. 그 단체는 구이세피나 푸마갈리 수녀를 떠나 온 수녀들이 만든 단체였다. 젊은 시절의 수고를 거쳐 중년의 느긋함을 즐길 42살의 나이에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새로운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0(1892-1902) 동안 그는 튜린과 나중에 밀라노에 머물면서 그 새 수녀회를 지휘하며 형식과 규범을 갖추어나갔고, 그들을 위한 회칙과 회헌을 작성하였다.

 

모든 것이 안전하게 잘 진행되는 듯 했지만, 1899년에 열린 첫 번째 수녀회 의회에서 튜린과 밀라노 수녀들 사이에서 불화가 발생했고, 밀라노 대주교인 복자 안드레아 카를로 페라리는 수녀회의 모든 장상들을 교체하고 복자 아르세니우스에게 한걸음 물러나 수녀회의 영적지도자를 포기하라는 알력을 행사했다. 다시 한 번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그는 또 한 번 고통스러운 분열 안에서 드러나신 하느님의 섭리를 대면하게 되었다.



카푸친이 되다

이미 여러 장상직을 연임한 53살의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1902621일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로베레에 있는 카푸작은형제회의 수련자로 들어왔다. 이 새롭고도 고된 삶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트리골로의 아르세니우스 형제. 비록 고령의 나이에 입회를 했어도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도전장을 내밀기를 서슴치 않았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었다. 더 힘든 것은 그동안 수녀들에게 재차 말해온 것을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위와 활동 안에서 진정한 자애심으로 드러나는 실천적인 사랑을 매일 주님께 청하는 것이었다.

 

유기서약을 한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젊은 카푸친 학생들의 영적 보조자로 베르가모로 파견되었다. 한동안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는 그곳에서 또한 제3회 프란치스칸을 보조하며 사제 사목의 마지막 해를 보냈다.



선종

1909년에 그는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요양시설이 갖춘 공동체로 이송되었고, 19091010일 밤 그는 심장 동맥류로 선종했다. 장례식은 초기 시절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프란치스칸 식으로 단순하면서도 장엄하게 치러졌다.

 

하느님과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 안에서 모든 신뢰를 두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그 변화 안에서,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매일의 기도, 성찬례의 거행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한 자선 행위로써 일하였다. 그는 침묵하고 숨기고 용서하며, 자신에게 다가온 일은 악하든 선하든 간에, 결코 스스로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않고,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께 훗날의 보상을 맡겨 드렸다.


트리골로의 복자 아르세니우스는 2017년 10월 7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다.